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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죽이지 마라

( 이주노동자 자살급증원인 실태조사 전면 실시, 고용허가제 전면 재검토, 인종차별금지법 즉각 제정 )

 

  참담하고 비통하다. 지난 86, 충주의 모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하던 꽃다운 네팔인 청년이 고용허가제 하에서 사업장 변경불가 등을 비관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튿날인 7일에는, 홍성의 한 돼지 축산농장에서 일하던 네팔인 청년이 역시 비슷한 괴로움을 동료들에게 털어놓은 후 죽음을 택했다. 최근 3년간 이처럼 자살을 택한 이주노동자들은 네팔만 하더라도 무려 21(20159, 20167, 20175)이다.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사망원인 중 1위이다. 같은 기간 산재(15)와 질병(9), 교통사고(5) 등에 비해 월등히 높다. 참으로 충격적인 통계이다. 이것이 비단 네팔인만의 현실일까? 현재 고용허가제 송출국가가 15개임을 감안하면, 한 해 수십 내지 수백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음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물론 모든 자살을 고용허가제와 연관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를 사용자에게 전적으로 종속시켜 놓은 현 제도의 반인권성과 열악한 노동환경 등을 감안한다면, 고용허가제가 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이 이처럼 참혹하건만, 역대 정부는 이와 관련한 공식적인 실태조사를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실시하지 않았다.

  과연 이들의 죽음이 정녕 우리와 아무 관계없다 하겠는가? 이제라도 우리 사회는 잃어버린 양심을 되찾아야 한다. 더 이상 이주노동자들의 자유를 봉쇄하고 사용자에게 종속시켜 온 적폐를 고집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이 정의이고 준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1979년 국회 비준을 통해 가입한 <UN인종차별철폐협약>을 이행할 책임을 갖고 있으며, 헌법 제6조는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의해 외국인의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근로기준법 제6조는 국적이나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대우를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굳이 이런 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직업선택의 자유와 행복추구권 등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가 아닌가? 이런 상식을 무시하고 이주노동자들의 자유를 박탈해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용자들의 편의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가?

  더 이상 이()를 취하기 위해 의()를 버리는 부끄러운 모습을 지속해서는 아니 된다. 이주노동자들의 잇단 자살은 우리 사회의 추악한 실상을 비추어주는 거울로서, 사회적 타살에 다름 아니다. 지금도 고귀한 생명들이 이 땅 위에서 신음하고 있고 자살을 고민하고 있다. 이 참혹한 현실 앞에서 잠든 양심을 흔들어 일깨우고 부당한 제도를 반성하고 개혁해가지 않는다면, 도리어 우리가 죽은 자일 것이다. 이에 이국땅에서 쓸쓸히 죽어간 이주노동자들의 영전에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으로 이 한 장의 성명서를 바치며,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강력히 촉구한다.

 

우리의 요구사항

 

이주노동자 자살급증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를 전면 실시하라!

정부는 민간이 참여하는 실태조사위원회를 즉각 구성하여 이주노동자들의 자살급증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고 그 개선책을 조속히 수립하라.

 

이주민 정책 컨트롤타워를 구성하여 고용허가제 전면 재검토와 근로기준법 개정 등을 즉각 추진하라!

현 제도는 무엇보다 사업장 변경(사유, 횟수, 기간 등)을 과도하게 제한함으로써 이주노동자를 사용자에게 철저히 종속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근로조건 저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뒷돈을 요구하는 등 사용자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바, 이는 결국 이주노동자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한편 농축산업과 어업 분야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는 근로시간, 휴게와 휴일에 관한 규정에서 적용 제외되는 바, 대가조차 없는 과도한 노동을 수시로 강요받고 있는 게 현실이며, 이 역시 이주노동자들의 주요한 자살요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어느덧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지 14년째이다. 그간 비전문인력을 단기순환방식으로 도입하여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데에만 충실했던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 인권침해는 물론이요 내국인 노동조건 저하에도 일조해왔다. 결과적으로 현행 고용허가제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할 것이다. 이제라도 누누이 지적되어 온 문제점을 개선하려면 오직 고용허가제를 전면 재검토하는 길뿐임을 천명한다. 아울러 정부와 국회는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농축산업과 어업 분야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역시 보호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제라도 정부는 이주민관련 법제와 정책들을 과감히 개선하고 올바르게 추진해갈 정책 컨트롤타워를 조속히 구성하라. 여기에 대한 민간의 참여는 필수 전제일 것이다. 지금껏 해당 법제와 정책들은 고용노동부와 법무부, 여성가족부 등으로 갈라져 추진되어온 바, 그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조정되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상황에 따라 왜곡되기 일쑤였다. 이제라도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책창구를 일원화함으로써 부처이기주의 등의 구태를 예방하고 합당한 원칙과 기준에 기초한 정책들을 단호히 추진해가야 한다는 걸 유념하기 바란다.


인종차별금지법을 즉각 제정하라!

인종차별금지에 대한 당위성은 사회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그간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한 부분으로 추진되어 온 까닭에 그 제정이 계속 미루어져왔다. 하지만 200만 이주민 시대를 맞이한 중에도 여전히 제도적 차별로 인해 이주민들이 죽음을 택하고 있는 현실은,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인종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룰 수 없다는 걸 웅변하고 있다. 개별적인 형태로라도 인종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 합당하고 시급한 바, 이는 향후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소수자를 보호하지 않는 사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무례하고 무지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이주민들의 인권과 복지증진,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은, 정의롭고 안전하며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믿는다. 정부와 국회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인종차별금지법을 제정함으로써 인권이 살아있는 나라다운 나라를 열어가라.

 

 

2017. 8. 23.

경남이주민센터, 김해이주민의집, 주한네팔인교민협의회(NRN)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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